식량과 생계
구석기 핵심- ①짐승 사냥
- ②열매·식물 채집
- ③조·기장 등 곡물 재배
- ④소·돼지 등 가축 사육
- ⑤강이나 바다에서 물고기 포획
③ 곡물 재배와 ④ 가축 사육은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것이다. 구석기 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이 없었으며, 오직 사냥·채집·어로로 식량을 마련하였다.
첫 번째: 두 번째:
신석기 시대에는 조·기장 등의 곡물을 재배하는 농경과, 짐승을 기르는 목축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정착 생활이 가능해졌다.
주거와 이동 · 정착
OX / 단답① ② ③ 강가의
구석기인들은 추위와 위험을 피해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생활을 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큰 짐승을 쫓아 무리 지어 이동 생활을 하였다. 정착 생활은 신석기 시대에 농경·목축이 시작된 이후 이루어졌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땅을 파고 지붕을 덮은 움집을 만들어 거주하였다. 강가나 바닷가에 자리 잡은 움집 유적이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예: 서울 암사동, 강원 양양 오산리).
도구의 변화
뗀석기 · 간석기 · 토기
제작 방법: 돌을 서 만든다.
도구 이름:
구석기 시대에는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짐승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 ①찍개·주먹도끼 → 슴베찌르개·돌날 → 긁개·밀개
- ②찍개·주먹도끼 → 긁개·밀개 → 슴베찌르개·돌날
- ③긁개·밀개 → 찍개·주먹도끼 → 슴베찌르개·돌날
- ④슴베찌르개·돌날 → 긁개·밀개 → 찍개·주먹도끼
- ⑤긁개·밀개 → 슴베찌르개·돌날 → 찍개·주먹도끼
초기: 하나의 석기를 여러 용도로 사용 → 찍개, 주먹도끼
중기: 다양한 석기 제작 → 긁개, 밀개
후기: 이전보다 작고 날카로운 석기 → 슴베찌르개, 돌날
① :
② :
① 찍개 — 하나의 석기를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초기 다목적 도구
② 주먹도끼 — 사냥·나무 손질·고기 자르기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 계통 발견
① :
② :
① 긁개 —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고기를 다듬을 때 사용 (경기 파주 출토)
② 밀개 — 가죽을 밀어 다듬거나 고기를 자를 때 사용
중기에는 하나의 석기를 다목적으로 쓰던 초기와 달리 용도에 따라 다양한 석기를 만들었다.
① ②
후기에는 이전보다 작고 날카로운 형태의 석기가 제작되었다. 슴베찌르개는 자루에 연결하여 창처럼 사용하였으며, 돌날은 길고 날카로운 날을 가진 석기이다.
- ①찍개와 주먹도끼
- ②슴베찌르개와 돌날
- ③간석기와 토기
- ④뗀석기와 금속 도구
- ⑤청동 농기구와 간석기
신석기 시대에는 돌을 정교하게 갈아서 만든 간석기와, 음식 조리·식량 저장에 사용한 토기를 사용하였다. ①②는 구석기 뗀석기이며, ⑤ 청동 농기구는 청동기 시대에 해당한다.
| 도구 | 용도 |
|---|---|
| 돌낫, 반달 돌칼 | |
| 갈돌, 갈판 | |
| 가락바퀴, 뼈바늘 | |
| 화살촉 |
• 돌낫·반달 돌칼 → 농사짓기 (곡식 수확)
• 갈돌·갈판 → 곡식 갈기
• 가락바퀴·뼈바늘 → 옷이나 그물 제작
• 화살촉 → 사냥
① ②
토기의 용도: 음식 조리와 식량 저장에 사용하였다. 빗살무늬 토기는 표면에 빗살 모양의 무늬가 있으며,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 ①ㄱ, ㄴ, ㄷ
- ②ㄱ, ㄷ, ㅁ
- ③ㄴ, ㄹ, ㅂ
- ④ㄷ, ㄹ, ㅁ
- ⑤ㄴ, ㄷ, ㅁ
구석기 도구: ㄱ 찍개 (초기), ㄷ 주먹도끼 (초기), ㅁ 슴베찌르개 (후기)
ㄴ 빗살무늬 토기·ㄹ 가락바퀴·ㅂ 돌낫은 모두 신석기 시대 도구이다.
구석기 → 뗀석기 (돌을 깨뜨려 제작)
신석기 → 간석기 (돌을 정교하게 갈아서 제작)
이것이 두 시대를 구분하는 가장 핵심적인 도구의 차이이다.
장례와 예술품
OX / 서술형• 장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매장하였다.
• 예술품: 동물의 뼈나 뿔을 이용하여 예술품을 만들었으며, 사냥의 성공과 사냥감의 풍요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제작하였다. (예: 충북 청주 사슴 뼈에 새긴 얼굴 조각)
① ② 특정 ③
신석기인들은 태양, 특정 동물, 영혼을 숭배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예술품을 제작하였다. 또한 조개껍데기·동물의 뼈나 이빨로 장신구도 만들었다.
구석기 시대에도 동물의 뼈나 뿔을 이용한 예술품을 제작하였다. 사냥의 성공과 사냥감의 풍요를 기원하는 목적이 있었다. 예술품 제작이 신석기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구석기 시대 대표 유적
유적지 위치① ②
이 외에도 공주 석장리, 상원 검은모루 동굴 등이 있다. 교과서 지도에는 두만강·압록강·한강·금강·남강·낙동강 등 주요 강가에 구석기 유적이 표시되어 있다.
계통: 계통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프랑스의 생 아슐 지역에서 발견된 발전된 형태의 주먹도끼이다. 1978년 연천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서양·아프리카와 같은 아슐리안 계통 주먹도끼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도 발달한 구석기 문화가 있었음이 증명되어 동아시아 구석기 역사가 새롭게 쓰였다.
- ①해발 1,000m 이상 높은 산지
- ②강가 또는 동굴 근처
- ③낮은 구릉 정상부
- ④바닷가 해안 지대만
- ⑤내륙 깊은 분지 지역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물을 구하기 편리하고 사냥감이 모이는 강가나, 추위를 피하기 좋은 동굴·바위 그늘 근처에 거주하였다. 교과서 지도에서도 구석기 유적이 주요 강 유역에 분포함을 볼 수 있다.
① ②
신석기 유적은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농경과 어로 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들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 간석기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자연환경
환경 변화신석기 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오늘날과 비슷해졌으며, 한반도 지형이 형성되었다. 큰 짐승 대신 작고 날쌘 동물이 늘어나 사냥 방식도 변화하였다.
- ①오늘날과 비슷한 기후로 안정되어 있었다.
- ②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었다.
- ③한반도의 지형이 지금과 같이 완전히 형성되었다.
- ④사슴, 멧돼지 등 작은 동물이 풍부하였다.
- ⑤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해져 어로 활동이 성행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환경은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는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①③④⑤는 모두 신석기 시대의 자연환경 특징에 해당한다.
구석기 시대 시작: 약 년 전
신석기 시대 시작: 약 년 전
※ 구석기 시대 시작은 일부 학설에서는 약 60~40만 년 전으로 보기도 한다. 신석기 시대 시작도 약 1만 2천 년 전 또는 약 8천 년 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신석기 시대의 농경과 생활
심화① ②
교과서에는 "조·기장 등의 곡물을 재배하는 농경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도 일부 지역에서 시작된다.
- ①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어 정착 생활을 하였다.
- ②조·기장 등의 곡물을 재배하였다.
- ③갈돌과 갈판으로 곡식을 갈았다.
- ④문자를 사용하여 기록을 남겼다.
- ⑤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옷과 그물을 만들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아직 문자가 사용되지 않았다. 문자의 사용은 청동기 시대 이후에 해당한다. ①②③⑤는 모두 신석기 시대에 실제로 이루어진 생활 모습이다.
① ② 동물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조개껍데기, 동물의 뼈나 이빨로 장신구를 만들었다. 부산 영도 등지에서 조개껍데기 가면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① ②
가락바퀴는 실을 뽑는(방적) 도구이며, 뼈바늘은 옷을 꿰매는 데 사용하였다. 충북 청주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① 농경: 조·기장 등의 곡물을 재배하였다.
② 목축: 짐승을 기르는 목축을 하였다.
③ 어로: 낚시 도구와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다. (이음낚시 도구 사용 — 복원, 부산 강서 출토)
종합 비교 문제
고난도| 구분 | 구석기 시대 | 신석기 시대 |
|---|---|---|
| 시기 | 약 년 전 | 약 년 전 |
| 주거 | 동굴·바위 그늘· | |
| 생활방식 | 생활 | 생활 |
| 도구 | ||
| 식량 획득 |
시기: 70만 / 1만
주거: 막집 / 움집
생활: 이동 / 정착
도구: 뗀석기 / 간석기·토기
식량: 사냥·채집 / 농경·목축·어로
| 유물 | 시대 (가/나) |
|---|---|
| 빗살무늬 토기 | |
| 슴베찌르개 | |
| 갈돌과 갈판 | |
| 주먹도끼 | |
| 가락바퀴 | |
| 찍개 |
빗살무늬 토기 → (나) | 슴베찌르개 → (가)
갈돌·갈판 → (나) | 주먹도끼 → (가)
가락바퀴 → (나) | 찍개 → (가)
- ①ㄱ, ㄴ
- ②ㄱ, ㄷ
- ③ㄴ, ㄷ
- ④ㄴ, ㄹ
- ⑤ㄷ, ㄹ
ㄴ 토기 제작 ○ — 신석기 시대에 처음 토기를 만들어 조리·저장에 사용
ㄹ 가락바퀴 사용 ○ — 옷이나 그물을 만들기 위한 도구
ㄱ 문자 사용 ✗ (청동기 이후) | ㄷ 이동 생활 ✗ (구석기 시대)
① 구석기 시대에는 돌을 정교하게 갈아 만든 간석기를 사용하였다. → 수정:
② 신석기 시대에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정착 생활을 하였다.
③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태양, 특정 동물 등을 숭배하여 관련 예술품을 만들었다.
④ 구석기 시대 초기에는 찍개, 주먹도끼 등 작고 날카로운 석기를 사용하였다. → 수정:
② O — 농경과 목축의 시작으로 정착 생활이 가능해졌다.
③ O — 신석기인은 태양·특정 동물·영혼을 숭배하며 예술품을 제작하였다.
④ X — 초기에는 오히려 하나의 석기를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다목적 도구(찍개, 주먹도끼)를 사용하였다. "작고 날카로운"은 후기의 특징이다.
- ①무리 생활에서 독립 생활로의 변화
- ②동굴 생활에서 바위 그늘 생활로의 변화
- ③이동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의 변화
- ④부족 생활에서 개인 생활로의 변화
- ⑤공동 생활에서 사유 재산 중심의 생활로의 변화
구석기 → 신석기의 가장 근본적인 생활 변화는 이동 생활 → 정착 생활이다. 이는 농경·목축의 시작, 움집 건설, 토기 사용 등 여러 변화의 기반이 되었다. ⑤ 사유 재산과 계급의 등장은 청동기 시대의 특징이다.
(ㄱ): (ㄴ):
이 문제는 선사 시대의 흐름 전체를 묻는 문항이다. 철기가 보급되면서 청동기는 일상에서 물러나 제사용·의식용·장신구용으로만 사용되었다. (→ 학습지 단원 4 내용)
② 군장(족장)이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여 이웃 부족을 정복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알 수 있는 사회 모습:
① 계급 발생 — 지배층(군장·족장)과 피지배층의 구분이 생겼다.
② 제정일치 사회 — 군장이 부족을 통솔하고 제사를 주관하였다.
③ 전쟁 발생 — 이웃 부족을 정복하며 세력을 키웠다.
④ 권위의 상징물 존재 — 청동 검·거울·방울이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 구석기·신석기 시작 연도 암기
☐ 뗀석기 초기·중기·후기 각 2개씩 암기
☐ 신석기 도구 — 용도별 분류 완성
☐ 두 시대 자연환경 차이 설명 가능
☐ 구석기·신석기 대표 유적 2곳씩 암기
청동기 시대
계급·고인돌·제정일치- ①기원전 5000년경
- ②기원전 3000년경
- ③기원전 2000년경~기원전 1500년경
- ④기원전 1000년경
- ⑤기원전 500년경
청동기는 기원전 2000년경~기원전 1500년경 만주에 보급된 뒤 점차 한반도로 확산되었다.
- ①지배층의 장신구
- ②제사용 도구
- ③무기
- ④농기구
- ⑤거울과 방울
청동은 재료가 귀하고 다루기 어려워 농기구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농기구와 일상생활 도구는 정교하게 만든 석기를 계속 사용하였다.
청동기 시대에는 조·피·보리 등을 재배하였으며, 일부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 ①농경·목축 발달 → 여분의 생산물 → 사유 재산·빈부 격차 → 계급 발생 → 군장 등장
- ②군장 등장 → 농경 발달 → 계급 발생 → 빈부 격차
- ③계급 발생 → 사유 재산 → 농경 발달 → 군장 등장
- ④이동 생활 → 정착 생활 → 계급 발생 → 농경 시작
- ⑤사유 재산 → 군장 등장 → 농경 발달 → 빈부 격차
농경·목축의 발달 → 여분의 생산물 발생 → 사유 재산 개념과 빈부 격차 발생 → 계급 발생 → 권력이 있고 재산이 많은 사람이 군장(족장)이 됨.
① ② ③
지배층이 죽으면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을 만들어 이 세 가지 청동 유물과 함께 묻었다. 이는 군장의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였다.
청동기 시대에는 제정일치 사회로, 군장(족장)이 부족을 통솔하고 제사까지 주관하였다.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분리되지 않은 사회이다.
- ①민무늬 토기와 미송리식 토기를 사용하였다.
- ②농사와 전쟁에 유리한 나지막한 언덕에 마을을 이루었다.
- ③울타리·도랑 등 방어 시설을 만들었다.
- ④청동으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여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 ⑤반달 돌칼과 돌낫으로 곡식을 수확하였다.
청동은 재료가 귀하고 다루기 어려워 농기구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농기구는 정교하게 만든 석기(반달 돌칼, 돌낫 등)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청동은 무기·장신구·제사용 도구에 한정하여 사용하였다.
① 식량 약탈 — 다른 부족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쟁이 일어났다.
② 좋은 땅 차지 — 농사에 유리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부족 간 경쟁과 전쟁이 발생하였다.
① 청동기 시대에 처음으로 움집이 등장하였다.
②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돌널무덤과 함께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이다.
③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계급이 없는 평등 사회를 이루었다.
② O — 고인돌과 돌널무덤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이다.
③ X — 청동기 시대에는 계급이 발생하여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었다.
- ①ㄱ, ㄴ
- ②ㄴ, ㅁ
- ③ㄱ, ㄷ, ㄹ
- ④ㄱ, ㄴ, ㄷ
- ⑤ㄷ, ㄹ, ㅁ
고인돌, 돌널무덤, 반달 돌칼은 청동기 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ㄴ 빗살무늬 토기 → 신석기 시대 | ㅁ 움집 → 신석기 시대
① ②
청동기 시대에는 민무늬 토기와 미송리식 토기 등에 곡식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덧무늬 토기와 구별된다.
| 구분 | 도구 | 주거 | 사회 |
|---|---|---|---|
| 구석기 | 뗀석기 | 동굴·막집 | 이동·무리 생활 |
| 신석기 | 움집 | 정착, 평등 사회 | |
| 청동기 | 청동기·간석기 |
- ①농경과 목축의 시작
- ②움집 생활
- ③계급의 발생과 지배자 등장
- ④토기의 사용
- ⑤정착 생활
계급 발생과 지배자(군장) 등장은 청동기 시대에 처음 나타난 사회 현상이다. ①②④⑤는 모두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단군·위만·8조법
건국 연도: 기원전 년
건국자: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세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다.
- ①ㄱ, ㄴ
- ②ㄱ, ㄷ
- ③ㄴ, ㄷ
- ④ㄴ, ㄹ
- ⑤ㄷ, ㄹ
단군 이야기에서 환웅이 바람·비·구름을 다스리고 농사를 관장했다는 내용 → 농경 사회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후손 → 하늘(신)의 권위를 가진 지배자 → 제정일치 사회
① ②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의 분포 지역을 통해 고조선의 문화 범위(만주~한반도 서북부)를 알 수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5세기경 철기 문화를 수용하고, 기원전 4세기경에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 ①기원전 2세기경 집권하였다.
- ②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 ③중국의 한과 한반도 남쪽 나라들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였다.
- ④고조선을 건국한 최초의 지배자이다.
- ⑤집권 이후 농업을 발전시키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고조선을 건국한 것은 단군왕검(기원전 2333년)이다. 위만은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에 집권하여 철기 문화를 본격 수용하고 세력을 크게 확대한 인물이다.
(ㄴ)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ㄷ) 중국의 한과 한반도 남쪽 나라들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였다.
- ①ㄱ → ㄴ → ㄷ
- ②ㄱ → ㄷ → ㄴ
- ③ㄴ → ㄱ → ㄷ
- ④ㄷ → ㄱ → ㄴ
- ⑤ㄷ → ㄴ → ㄱ
기원전 4세기 '왕' 칭호 사용(ㄴ) → 기원전 2세기 위만 집권(ㄱ) → 위만 집권 이후 중계 무역(ㄷ)
① 계급의 발생 —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였다 (신분에 따른 벌의 차이).
② 사유 재산의 형성 —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였다 (도둑질 금지 조항).
③ 형벌의 존재 — 살인, 상해, 절도 등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었다.
멸망시킨 나라: 왕조
멸망 연도: 기원전 년
한 무제가 정복 활동을 벌이며 고조선을 침략하였고, 수도가 함락되어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였다. 이후 한은 한 군현을 설치하였다.
- ①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다.
- ②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하였다. 철기 문화와는 무관하다.
- ③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뉘어 있었다.
- ④사유 재산을 허용하고 형벌이 존재하였다.
- ⑤한의 침략으로 수도가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하였으나, 기원전 5세기경 철기 문화를 수용하고 위만 집권 이후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따라서 "철기 문화와 무관하다"는 내용은 틀렸다.
중국의 한과 한반도 남쪽 나라들 사이에서 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음.
위만 집권 이후 고조선은 중국의 한과 한반도 남쪽 나라들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경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에서 성립하였다.
②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은 고조선의 문화 범위를 보여 준다.
③ 고조선의 8조법 중 5개 조항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② O
③ X — 8조법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3개 조항이다.
고조선은 랴오닝(요령) 지방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형성하였다.
- ①ㄱ, ㄴ
- ②ㄴ, ㄷ
- ③ㄱ, ㄷ, ㄹ
- ④ㄱ, ㄴ, ㄹ
- ⑤ㄴ, ㄷ, ㄹ
고조선의 8조법을 통해 계급의 발생(ㄱ), 사유 재산의 형성(ㄷ), 형벌의 존재(ㄹ)를 유추할 수 있다. ㄴ 평등 사회는 오히려 반대(불평등 계급 사회)이다.
- ①만주와 한반도 서북부 지역
- ②한반도 동해안 지역
- ③한반도 남부 지역
- ④만주 쑹화강 유역
- ⑤압록강 중류 지역
고조선은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성립하였다. ④ 만주 쑹화강 유역은 부여, ⑤ 압록강 중류는 고구려의 성립 지역이다.
철기 보급과 여러 나라의 성장
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보급 시기: 기원전 세기경
널리 사용: 기원전 세기
철기는 기원전 5세기경 중국으로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전해졌고,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다.
- ①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음
- ②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문자를 발명하였음
- ③한반도에 한자가 전래되었음
- ④한반도에서 제지 기술이 발달하였음
- ⑤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였음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붓이 출토된 것은 한반도에 한자가 전래되었음을 추정하게 해 준다.
제천 행사 이름:
개최 시기:
부여는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 시기에는 노래하고 춤추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 ①왕이 전국을 직접 통치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였다.
- ②왕이 중앙을 다스리고 '가(加)'들이 각자의 영역을 다스리는 연맹 왕국이었다.
- ③신지·읍차라는 군장이 다스리는 소국 연합이었다.
- ④천군이 제사를 주관하고 왕이 정치를 담당하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
- ⑤상가·대가가 존재하는 제가 회의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부여는 연맹 왕국으로, 왕이 중앙을 다스리고 '가(加)'들이 사출도(각자의 영역)를 다스렸다. ⑤ 제가 회의는 고구려의 기구이다.
건국 세력:
건국 연도: 기원전 년
초기 도읍:
고구려는 부여에서 내려온 세력이 압록강 중류의 토착민들과 연합하여 기원전 37년에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왕 아래 상가·대가가 존재하며, 제가 회의라는 회의체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서옥제는 고구려의 혼인 풍습으로, 신랑이 신부 집 뒤에 작은 집(서옥)을 짓고 살다가 자녀가 생기면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형태이다.
- ①옥저와 동예는 한반도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 ②읍군·삼로라고 불리는 군장이 각 지역을 통치하였다.
- ③옥저와 동예는 제가 회의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 ④고구려의 간섭을 받아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 ⑤농사가 발달하고 소금·해산물이 풍부하였다.
제가 회의는 고구려의 기구이다. 옥저와 동예는 읍군·삼로라는 군장이 통치하였으며, 고구려의 간섭으로 독자적인 정치 체제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ㄱ): (ㄴ): (ㄷ): (ㄹ):
혼인 풍습:
장례 풍습:
옥저의 혼인 풍습은 민며느리제(어릴 때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운 뒤 혼인시키는 제도)이며, 장례는 뼈를 가족 공동 무덤에 안치하는 가족 공동 무덤 풍습이 있었다.
- ①부여에서 내려온 세력이 한강 유역에 자리 잡으며 성립하였다.
- ②고조선 유민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철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성립하였다.
- ③만주의 여러 부족이 연합하여 성립하였다.
- ④압록강 유역의 토착민이 독자적으로 성립하였다.
- ⑤중국으로부터 이주한 세력이 한반도에서 성립하였다.
삼한은 고조선의 유민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우수한 철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성립하였다.
(ㄱ): (ㄴ): (ㄷ):
삼한에서 신지·읍차는 정치를 담당하고, 천군(제사장)은 소도에서 제사 의식을 주관하였다. 소도는 죄인이 도망해도 잡을 수 없는 종교적 성역이었다.
- ①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되었다.
- ②마한 목지국의 군장이 삼한을 대표하였다.
- ③5월과 10월에 제천 행사를 개최하였다.
- ④삼한은 제정일치 사회로 군장이 정치와 제사를 모두 담당하였다.
- ⑤농업(벼농사)이 발달하였다.
삼한은 제정 분리 사회이다. 정치(군장)와 제사(천군)가 분리되어 있었으며, 천군이 소도에서 제사를 주관하였다. 제정일치 사회는 부여·고구려·고조선 등의 특징이다.
| 나라 | 제천 행사 이름 | 시기 |
|---|---|---|
| 부여 | ||
| 고구려 | ||
| 동예 | ||
| 삼한 | 제천 행사 |
부여 → 영고 (12월)
고구려 → 동맹 (10월)
동예 → 무천 (10월)
삼한 → 제천 행사 (5월·10월)
- ①당시 중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②우리 민족이 독자적인 화폐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 ③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 ④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⑤고조선이 중계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명도전은 중국 전국 시대에 사용한 화폐이다. 이 화폐가 우리나라 철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것은 당시 중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 구분 | 부여 | 고구려 |
|---|---|---|
| 성립 | 만주 쑹화강 유역 | 압록강 중류 |
| 회의 기구 | 제가 회의 | |
| 제천 행사 | 영고 (12월) | |
| 혼인 풍습 | - |
부여 회의 기구 → 왕과 가(加)들의 회의
고구려 제천 행사 → 동맹 (10월)
고구려 혼인 풍습 → 서옥제
- ①ㄱ, ㄴ
- ②ㄴ, ㄷ
- ③ㄱ, ㄷ, ㄹ
- ④ㄱ, ㄴ, ㄹ
- ⑤ㄴ, ㄷ, ㄹ
철제 농기구 → 농업 생산량 증가(ㄱ), 철제 무기 → 전쟘 활발(ㄷ), 세력 확대로 여러 나라 형성(ㄹ).
ㄴ 평등 사회는 철기 시대의 결과가 아니다 (계급 사회는 청동기부터 심화).
- ①농사지을 땅이 풍부하여 밭농사와 목축이 활발하였다.
- ②농사지을 땅이 부족하여 전쟁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 ③덩이쇠를 화폐처럼 사용하였다.
- ④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개최하였다.
- ⑤족외혼과 책화 풍습이 있었다.
고구려는 산이 많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여, 전쟁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③ 덩이쇠 → 변한(삼한), ④ 영고 12월 → 부여, ⑤ 족외혼·책화 → 동예이다.
고구려의 성장과 팽창
소수림왕·광개토대왕·장수왕- ①ㄱ, ㄴ
- ②ㄱ, ㄴ, ㄷ
- ③ㄴ, ㄷ, ㄹ
- ④ㄱ, ㄹ, ㅁ
- ⑤ㄴ, ㄷ, ㅁ
소수림왕(4세기 후반)은 전진에서 불교 수용(ㄱ), 태학 설립(ㄴ), 율령 반포(ㄷ)로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ㄹ 낙랑군 멸망 → 미천왕 | ㅁ 진대법 → 고국천왕
고구려 고국천왕(2세기 후반)은 진대법을 시행하여 봄에 식량을 빌려 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방식으로 빈민을 구제하였다.
- ①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 ②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였다.
- ③거란과 후연을 격파하여 만주와 요동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 ④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 ⑤'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평양 천도(427)는 장수왕의 업적이다. 광개토 대왕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영락'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평양 천도는 그 아들 장수왕이 추진하였다.
① 귀족 세력 약화 — 국내성에 기반을 둔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를 옮겼다.
② 평양의 지리적 이점 — 평양은 남진 정책 추진에 유리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자, 신라와 백제는 나제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한성 함락 연도:
피살된 백제 왕:
장수왕은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이로 인해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 왕 | 주요 업적 |
|---|---|
| 태조왕 (1세기) | |
| 미천왕 (4세기 초) | |
| 고국원왕 (4세기 중) |
태조왕 → 옥저 정복, 요동 지방 진출
미천왕 → 낙랑군 멸망시켜 세력 확대
고국원왕 → 전연의 침입으로 수도 함락, 백제군을 막다가 전사
①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 —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② 금관가야에 타격 — 낙동강 유역의 금관가야가 이 과정에서 큰 타격을 받아 쇠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체제 정비 과정에서 중앙 관리들을 대대로(수상)를 비롯한 10여 등급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 ①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다.
- ②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 ③신라와 백제가 나제 동맹을 맺었다.
- ④고구려가 한강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신라를 복속시켰다.
- ⑤충주 고구려비가 건립되었다.
장수왕은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하고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신라를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않았다. 신라는 나제 동맹을 통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①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② 소수림왕은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누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였다.
③ 광개토 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스스로 '태왕'이라고 칭하였다.
② X — 5부 편성과 지방 관리 파견은 고국천왕(2세기 후반)의 업적이다. 소수림왕은 불교 수용·태학 설립·율령 반포를 하였다.
③ O
- ①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②수나라의 침입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 ③평양성을 공격한 백제군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 ④전연과의 전쟁 중 전사하였다.
- ⑤왜군의 침입을 방어하다 전사하였다.
고국원왕(4세기 중반)은 전연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겪었고, 이후 평양성을 공격한 백제 근초고왕의 군대를 막다가 전사하였다.
(ㄴ) 미천왕이 낙랑군을 멸망시켰다.
(ㄷ)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ㄹ) 고국천왕이 진대법을 시행하였다.
- ①ㄹ → ㄴ → ㄱ → ㄷ
- ②ㄱ → ㄴ → ㄹ → ㄷ
- ③ㄴ → ㄹ → ㄱ → ㄷ
- ④ㄹ → ㄱ → ㄴ → ㄷ
- ⑤ㄱ → ㄹ → ㄷ → ㄴ
고국천왕 진대법(2세기 후반, ㄹ) → 미천왕 낙랑군 멸망(4세기 초, ㄴ) → 소수림왕 불교·율령(4세기 후반, ㄱ) → 장수왕 평양 천도(427, ㄷ)
백제의 발전과 중흥
근초고왕·웅진·성왕·사비
건국 세력:
초기 도읍: 유역
백제는 마한의 소국에서 출발하여, 부여·고구려에서 내려온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연합하여 건국하였다.
- ①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 ②관리의 등급을 마련하고 관복의 색으로 서열을 구분하였다.
- ③22담로를 설치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 ④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겼다.
- ⑤마한의 남은 세력을 복속시켜 남해안까지 진출하였다.
고이왕은 관리의 등급을 마련하고 관복의 색으로 서열을 구분하며 주변 마한 소국을 복속시켰다.
① 불교 수용 → 침류왕 | ③ 22담로 → 무령왕 | ④ 사비 천도 → 성왕 | ⑤ 마한 남은 세력 복속 → 근초고왕
① 영토 확장 — 남쪽으로 마한의 남은 세력을 복속시켜 남해안까지 진출하고, 북쪽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며 황해도 일부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② 해상 진출 — 중국 남조의 동진, 왜와 교류하며 해상 무역을 활발히 하였다.
이유:
연도: 년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자,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겼다.
무령왕은 22담로를 설치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영토 일부를 회복하며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 →
한강 유역의 한성 → 475년 장수왕의 남진으로 웅진(공주) 천도 → 538년 성왕이 사비(부여)로 천도
성왕은 부여 계승 의식을 내세우며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변경하고, 중앙에 22부의 실무 담당 관청을 설치하며 통치 조직을 정비하였다.
- ①고이왕 — 동진으로부터 불교 수용
- ②침류왕 — 22담로 설치
- ③근초고왕 —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 ④성왕 — 신라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고구려에 대항
- ⑤무령왕 — 사비(부여)로 천도
① 불교 수용 → 침류왕 | ② 22담로 → 무령왕 | ④ 신라와 혼인 → 동성왕 | ⑤ 사비 천도 → 성왕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황해도 일부를 차지하였다.
백제의 침류왕은 중국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다.
① 농경 발달 — 한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서 농업 생산력이 높았다.
② 해상 교통에 유리 — 서해와 연결되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유리하였다.
- ①중국 남조의 양과 교류하였다.
- ②신라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 ③22담로를 설치하여 지방을 통제하였다.
- ④고구려를 공격하여 영토 일부를 회복하였다.
- ⑤부여 계승 의식을 내세워 국호를 바꾸었다.
동성왕은 신라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①③④ → 무령왕의 업적 | ⑤ → 성왕의 업적
①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내려온 세력이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연합하여 건국하였다.
② 성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③ 무령왕은 중국 남조의 양과 교류하며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② X —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
③ O
신라의 성장과 한강 유역 점령
내물왕·지증왕·법흥왕·진흥왕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 왕
신라의 왕호: 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내물왕 때 사용) → 왕(지증왕 때 사용)
- ①김씨의 왕위 독점이 시작되었다.
- ②'마립간' 칭호를 사용하였다.
- ③고구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왜군을 격퇴하였다.
- ④고구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 ⑤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았다.
내물왕 때 왜가 신라에 침입하자 광개토 대왕(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군을 격퇴하였다. 스스로 격퇴한 것이 아니다.
- ①ㄱ, ㄴ, ㄷ
- ②ㄱ, ㄴ, ㄹ, ㅁ
- ③ㄴ, ㄷ, ㄹ
- ④ㄱ, ㄷ, ㅁ
- ⑤ㄷ, ㄹ, ㅁ
지증왕: 나라 이름 '신라'(ㄱ), '왕' 칭호(ㄴ), 우산국 정복(ㄹ), 우경 장려(ㅁ)
ㄷ 불교 공인 → 법흥왕의 업적
① 율령 반포 —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② 관리를 17등급으로 나누고 관복의 색으로 구분
③ 상대등 설치 — 화백 회의를 이끌게 함
④ 병부 설치 — 군권 장악
⑤ 불교 공인 — 백성의 사상 통합
⑥ 금관가야 정복 (532) 후 지배층 흡수
⑦ '건원'이라는 연호 사용 — 자주성 표현
① 고구려와 백제의 연결 차단 — 두 나라가 협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② 황해를 통해 중국과 직접 교역 — 중국과 직접 교류하는 해상 통로를 확보하였다.
- ①가야 연맹을 정복하였다.
- ②한강의 상류와 하류를 모두 장악하였다.
- ③고구려 영토인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다.
- ④황룡사를 지어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였다.
- ⑤상대등을 설치하여 화백 회의를 이끌게 하였다.
상대등 설치는 법흥왕의 업적이다. 진흥왕은 가야 정복, 한강 장악, 함흥평야 진출, 황룡사 건립, 화랑도 국가 조직 재편을 주요 업적으로 남겼다.
진흥왕은 점령한 지역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워 영토 확장을 기념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등이 있다.
- ①중국 남조와 직접 교류하였다.
- ②백제와 동맹(나제 동맹)을 맺었다.
- ③왜와 동맹을 맺었다.
- ④고구려에 복속하여 안전을 보장받았다.
- ⑤율령을 반포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눌지왕은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제와 동맹(나제 동맹)을 맺었다.
정복된 가야:
위치:
진흥왕은 562년 고령의 대가야를 포함한 가야 연맹을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 지역을 장악하였다.
- ①귀족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 ②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 백성의 사상 통합을 위해
- ③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 ④평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 ⑤전쟁을 금지하는 도덕적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
삼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수용하였다. 불교는 지방 세력을 포용하고 백성의 사상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법흥왕 때 설치된 상대등은 화백 회의를 이끄는 신라의 최고 귀족 대표 직책이다.
| 왕 | 주요 업적 |
|---|---|
| 내물왕 | |
| 지증왕 | |
| 법흥왕 | |
| 진흥왕 |
내물왕 → 김씨 왕위 독점, 마립간 칭호, 광개토 대왕 도움으로 왜 격퇴
지증왕 → '신라' 국호·'왕' 칭호 사용, 우산국 정복, 우경 장려
법흥왕 → 율령 반포, 상대등·병부 설치, 불교 공인, 금관가야 정복, '건원' 연호
진흥왕 → 한강 유역 장악, 가야 정복, 화랑도 재편, 황룡사 건립
가야 연맹의 성장과 멸망
금관가야·대가야·철기 문화① 풍부한 철 생산 — 우수한 철기를 만들고 철제 농기구로 높은 농업 생산력을 유지하였다.
② 해상 교통의 이점 — 낙랑, 왜 등과 해상 교류를 통해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 ①백제의 직접 침략으로 타격을 받았다.
- ②신라 법흥왕에 의해 532년 병합되었다.
- ③4~5세기 신라와의 경쟁, 광개토 대왕의 왜 격퇴 과정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
- ④고구려의 직접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 ⑤내부 반란으로 분열하였다.
금관가야는 4세기 이후 신라와의 경쟁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5세기에 고구려(광개토 대왕)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큰 타격을 받아 쇠퇴하였다. 이후 532년 신라 법흥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① 각 소국의 독자성 — 각 소국이 독자적인 권력을 유지하여 지배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였다.
② 백제와 신라의 압박 — 6세기 이후 두 나라의 압박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었다.
금관가야: 년, 멸망시킨 나라:
대가야: 년, 멸망시킨 나라:
금관가야: 532년, 신라 법흥왕에 의해 병합
대가야: 562년, 신라 진흥왕의 침략으로 멸망
① 초기에는 고령의 금관가야가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② 변한 지역의 작은 나라들이 연합하여 가야 연맹을 형성하였다.
③ 가야 토기는 일본의 스에키 토기에 영향을 주었다.
② O
③ O
- ①신라 법흥왕에 의해 병합된 금관가야이다.
- ②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한 대가야이다.
- ③낙랑, 왜와 주로 교류한 금관가야이다.
- ④광개토 대왕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은 금관가야이다.
- ⑤한강 하류에 위치한 가야이다.
경북 고령은 대가야의 중심지이다. 이 무덤들은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한 대가야의 유적으로, 뛰어난 철기 문화와 지배층의 권위를 보여준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김해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삼국의 문화와 대외 교류
불교·도교·과학·일본 전파
백제:
신라:
백제 → 익산 미륵사지 석탑 또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 →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
- ①ㄱ, ㄴ, ㄷ
- ②ㄴ, ㄷ, ㄹ
- ③ㄱ, ㄷ, ㄹ
- ④ㄴ, ㄹ, ㅁ
- ⑤ㄷ, ㄹ, ㅁ
백제 금동 대향로(ㄴ), 고구려 고분 벽화 사신도(ㄷ), 백제 산수무늬 벽돌(ㄹ)은 도교의 영향을 보여준다.
ㄱ 첨성대 → 천문학(도교 아님) | ㅁ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 불교
①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에 한문, 논어, 천자문을 전파하였다.
② 오경박사, 의박사, 역박사, 화가, 공예 기술자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하며 문화를 전파하였다.
| 나라 | 일본에 전파한 내용 |
|---|---|
| 백제 | |
| 고구려 | |
| 신라 |
백제 → 불교 전파, 한문·논어·천자문(아직기·왕인), 각종 박사·기술자
고구려 → 종이·먹 제조법(담징), 쇼토쿠 태자의 스승(혜자),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영향
신라 → 조선술(배 만드는 기술), 축제술(둑 쌓는 기술)
① 왕의 권위 — 천체 현상이 왕의 권위와 연결된다고 여겨, 천문 관측이 중요하였다.
② 농업 — 농사의 시기를 정하기 위한 천체 관측이 필요하였다.
- ①성골과 진골을 제외하고 6~1두품으로 신분을 구분하였다.
- ②신분에 따라 정치 활동의 범위가 제한되었다.
- ③일상생활까지 신분에 따라 제한이 있었다.
- ④골품제는 삼국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신분 제도였다.
- ⑤사회 활동의 범위도 골품에 따라 결정되었다.
골품제는 신라의 신분 제도이다. 삼국에 공통으로 적용된 것이 아니다. 고구려·백제는 귀족, 평민, 천민의 신분 구분이 있었으나 골품제는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이다.
고구려 — 초기: 돌무지무덤, 이후: 굴식 돌방무덤(벽화 제작)
백제 — 한성기: 고구려식 계단식 돌무지무덤, 웅진기: 굴식 돌방무덤·벽돌무덤
신라 — 돌무지덧널무덤(도굴이 어려워 껴묻거리 보존), 이후 굴식 돌방무덤
가야 — 돌덧널무덤
•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보존됨
• 천마도, 금관 등이 출토됨
- ①굴식 돌방무덤
- ②계단식 돌무지무덤
- ③돌무지덧널무덤
- ④벽돌무덤
- ⑤돌덧널무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대표적인 고분 양식이다. 구조상 도굴이 어려워 천마도, 금관 등 많은 껴묻거리가 온전히 보존되었다.
이/가 만든
고구려의 왕산악이 중국의 악기를 개조하여 거문고를 제작하였다.
- ①신라와 백제의 문화 교류
- ②신라와 일본의 문화 교류
- ③신라와 서역의 문화 교류
- ④신라의 금속 공예 기술 발전
- ⑤신라의 중국 직접 교역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유리그릇, 금제 장식 보검, 상감 유리구슬, 뿔 모양의 잔은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준다.
| 나라 | 교육·학문 내용 |
|---|---|
| 고구려 | 수도에 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교육 |
| 백제 | 가 유교 경전·의학·천문 역법을 교육 |
| 신라 | 에 유교 경전 공부 기록이 남아 있음 |
고구려 → 태학 | 백제 →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 신라 → 임신서기석
초기: 생활 모습을 표현한 그림(수렵도, 씨름도 등)
불교 전래 이후: 불교적 요소를 반영한 그림
후기: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사신도(동서남북을 지키는 방위신)를 많이 그림
① 불교는 백성들이 먼저 수용하고, 이후 왕실로 전파되었다.
② 삼국에서는 농업을 위한 천체 관측이 중요하여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③ 삼국 중 신라가 일본과 가장 활발히 교류하였다.
② O
③ X — 삼국 중 백제가 일본과 가장 활발히 교류하였다.
귀족: 비단옷을 입고 보석으로 치장, 쌀밥과 고기를 먹으며 기와집에 거주
평민: 거친 베나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조·기장·보리·콩을 주로 먹으며 움집이나 귀틀집에 거주